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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한국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등단 25주년을 맞이해 시작된 ‘복복서가×김영하 소설’ 시리즈 2차분 3종이 출간되었다. 김영하라는 이름을 문단과 대중에 뚜렷이 각인시킨 첫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분단 이후 한국 문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빛의 제국』, 그리고 비교적 최근작인 소설집 『오직 두 사람』이다. ‘자살안내인’이라는 기괴한 직업을 가진 화자를 등장시켜 그가 만난 ‘고객’들의 일탈적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한국문학의 감수성을 김영하 출현 이전과 이후로 갈라놓은 문제작이다. 복복서가판은1996년 초판의 모습을 보존한다는 취지에 충실했던 지난 개정판들과 달리, 원숙기에 접어든 작가가 세밀하게 다듬은 마지막 결정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
김영하
출판
복복서가
출판일
2022.05.23

1. 읽기 전에

(1) 저자 소개 - 김영하

1995년 계간 『리뷰』에 「거울에 대한 명상」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퀴즈쇼』 『빛의 제국』 『아랑은 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소설집으로 『오직 두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오빠가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호출』이 있다. 

 

2.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아마도 처음 시작할 때라고 생각한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 같다. 따라서 작가의 첫 작품을 보는 것은 그 작가를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첫 작품뿐 아니라 다음 작품도 여러 권 읽어도 여전히 어려운 작가도 존재한다. 나에겐 김영하 작가가 그렇다. 처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최근 다시 읽어도 비슷한 느낌을 받긴 했다.

 

가장 최근에 나온 2022년 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작가의 말에는 이런 글이 있다.

 

이 소설은 한 시대의 산물이고, 세상에 나가 독자를 만난 지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정도 공공재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가끔씩 꺼내 들춰볼 때마다 내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질문이 튀어나온다. 그때의 너는 누구였으며, 도대체 왜 이런 글을 썼던 것이냐. (172쪽)

 

소설은 나라는 작중화자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나는 의뢰인의 죽음을 도와주는 자살도우미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죽음으로 안내하지는 않고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사람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욕망을 확인하고서야 일에 착수한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는 두 명이다. 자실이라는 죽음을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류보선 문학평론가의 자살의 윤리학이라는 해설을 읽으면 이해는 저 멀리 달아나고 만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는 해설이 없었는데 다시 펴내며 들어간 것 같다. 이럴 때는 그냥 책을 읽고 내 나름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답이다.

 

죽음을 소재로 한 소설이어서 무거운 내용이 가득하지만, 이번에 읽었을 때에는 다양한 회화의 묘사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에서 클래식과 재즈의 묘사가 탁월하듯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는 세 작품의 묘사가 표현된다. 먼저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이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그 그림을 모사해보았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마라의 표정이다. 내가 그린 마라는 너무 편안해 보여서 문제다. 다비드의 마라에게선 불의의 기습을 당한 젊은 혁명가의 억울함도, 세상 번뇌에서 벗어난 자의 후련함도 보이지 않는다. 다비드의 마라는 편안하면서 고통스럽고 증오하면서도 이해한다. (7쪽)

 

글을 읽고 마라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리곤 작가의 표현에 수긍하게 된다.

 

다음으로 나의 의뢰인이 되는 세연이다. 그녀는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를 닮았다고 묘사된다.

 

정염이 채 가시지 않은 눈동자에선 푸른빛이 났다.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를 닮았다는 것이었다.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잠든 틈에 목을 잘라 죽였다는 고대 이스라엘의 여걸 유디트. 클림트는 유디트에게서 민족주의와 영웅주의를 거세하고 세기말적 관능만을 남겨두었다. (18쪽)

 

그림을 보고서 그녀의 묘사를 읽고 나서 앞으로의 그녀의 행동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르다나팔의 죽음>이다. 두 번째 죽음인 미미와의 의뢰에 앞서 소개된 작품이다.

 

뒤늦게 사르다나팔 왕을 발견하게 되는 관람자들은 숨을 죽이게 마련이다. 냉정하게 자신의 패배를 지켜 보는 왕과 몸을 뒤틀며 죽어가는 여인들의 대조가 이 그림의 백미다. 이 광란의 무도를 지켜보는 사르다나팔 왕은 들라크루아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117쪽)

 

소설에서는 미미는 멋지게 떠났다. 유디트는 편안하게 갔다고 표현되어 나는 의뢰를 완성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120쪽)

 

마지막 페이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이다. 하지만 작가가 27살에 썼다고 밝힌 이 소설은 작가가 소설을 쓴 무렵의 나이에 읽어도 그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요즘 읽어도 여전히 나에겐 어렵다. 하지만 왠지 김영하 작가의 글이 읽고 싶어질 때면 가장 먼저 집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다.

 

3. 소설에 등장하는 작품들

(1) 다비드 <마라의 죽음>

출처 구글

(2) 클림트의  <유디트>

출처 구글

(3)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의 죽음>

출처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