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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한국소설

재수사 - 22년 전 미제사건을 다시 수사하라!

재수사 1

 

 
2000년 8월 10일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으로 인하여 1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소년의 실제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 <재심>은 경찰의 강압적인 수사로 인하여 한 소년의 삶이 망가지는 것에 분노를 하지만 끝내 그 과오를 바로잡기에 감동을 주는 영화였다. 말 그대로 재심은 심리가 끝난 사건을 다시 심리하는 것이기에 먼저 사법부는 자신의 과오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꺼려질 수밖에 없는 재판일 것이다. 장강명 작가가 6년 만에 펴낸 『재수사』도 ‘재(再)’라는 글자가 있기에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다시 수사하는 것 일거라 예상이 되었고 역시 22년 전의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었다.
 
2000년 8월 1일 밤부터 2일 사이 신촌의 한 오피스텔에서 여대생 민소림이 살해되었다. 흉기는 칼이고 폐와 심장 두 군데에 상해를 입고 숨졌는데 살해시간을 특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시신에는 우의와 이불이 덮여 있고 하의가 벗겨져 있는 상태였다. 게다기 민소림의 체내에는 누군가의 DNA가 있었지만 수사 당시에는 범인을 잡는데 실패한 사건이었다. 당시 수사팀이 막내인 정철희 반장은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사라진 지금 다시 수사하려고 한다.
 
미스터리 소설은 작가가 범인을 숨기고 독자가 그 범인을 찾는 게임과도 비슷하다. 소설의 구성이 범인을 쫓는 과정을 그리는 장과 범인의 독백이 주를 이루는 장이 번갈아 가면서 나오기에 사건을 조사하는 5명의 형사팀원 중 3명인 연지혜 형사를 비롯한 정철희, 박태웅 형사 보다 독자인 내가 범인에 대한 단서를 더 많이 알게 된다. 그럼에도 소설의 끝까지 가서야 범인의 윤곽을 알 수 있었다.
 
소설에 중요한 축의 하나는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이다. 살해된 민소림은 도스토예프스키 독서토론의 멤버였고 그 당시 멤버였뎐 사람들을 만나던 중 단서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시작인데 당시 독서토론을 모집하는 공고로 사용되었다. 그 문장에 끌린 사람들이기에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나온다. 심지어 연지혜 형사는 살해 현장이 소설 『백치』에 묘사된 것과도 비슷한 것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2020년대 대한만국의 화두를 ‘공허’‘불안’으로 꼽고 그것을 소설 속에 녹여내려 신계몽주의, 트롤리 딜레마, 삶의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에 대하여 생각 등을 소설 곳곳에 드러내고 있었다.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도 전부는 아니지만 몇 권을 읽었기에 소설에 등장하는 용어는 낯설지가 않았지만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범인만 잡으면 끝...이라는... 소설과는 조금 다르게 어려운 소설이었다. 특히,
 
인간의 정체성은 매우 깊은 차원에서 다른 인간과, 여러 공동체들과, 묶여있다. 우리는 입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장(場, Field)이다. (132쪽)
 
수사진행을 다룬 장의 대척점의 범인의 독백의 장에서 나오는 말인데, 인간의 정체성을 묘사한 글 중에 가장 적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스터리 소설답게 사이렌소리, 블록체인 등 작가가 파 놓은 함정(어떤 함정인지는 소설 속에서 확인하는 것이 좋을 듯... 그게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재미니까)에 빠져 전혀 엉뚱한 범인을 예상했지만, 범인의 진상을 알고 나니 조금은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조금 뜬금없지만 연지혜 형사가 자신이 형사가 된 이유를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소설의 흐름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었다.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일과 고통을 없애는 일은 분명히 다른 거 같아요. 앞의 것을 좋은 일이고, 뒤의 것을 옳은 일이에요. 저는 옳은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러지 않으면 시간을 허비하면서 인생을 보낼 거 같았고요. (328쪽)